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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 모음] 황병승, 주치의 h

by 장하아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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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 h

 

황병승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 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 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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