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화자가 흰 바람벽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읽으면 좋다. 흰 바람벽이 일종의 스크린의 역할을 한다. 벽이 하얗기 때문에 더 텅 비어있는 느낌.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심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옷은 제2의 피부. 주체를 대변하는 상징물로 사용되기도. ‘지치운’ ↔ ’쉬이고’ 다 낡은 무명샤쓰가 이 사람의 존재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줌. 누가 봐도 때가 많이 묻어있는, 멀끔하지 않은 무명셔츠. 지치고 축 늘어져있음. 정갈하게 빨아입거나 좋은 옷을 사 입을 상황이 아닌 이 사람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것.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음식은 친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가장 즉각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 따끈한 것을 떠올린다는 건 이 사람의 내면이 춥다는 것. 감주-어머니와 연결이 됨. 외로운 순간에 나를 위로해줬던 감주가 떠오른 것.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장면을 바꾸는 느낌
이 흰 바람벽에 스크린에 비추어 보는 느낌.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 가난한 상황.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따뜻한 음식)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쓰라린 장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있음.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따뜻하고 행복한 모습 ↔ 화자의 외로움 부각(화자는 애인도 없고, 아이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높고’ : 백석을 위대하게 만드는 부분으로, 백석의 자존심이 드러남. 나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지만 높다. ‘높고’를 버리지 않는다는 자존심. 때문에 뒤에서 ‘프랑시쓰 쨈’,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나오는 것이다. 화자의 정신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벅차오름.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모순어법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진정한 귀한 것은 외롭고 쓸쓸하고 높은 운명을 타고났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별 거 아닌 자연물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자연물과 위대한 시인을 같은 수준에 놓음. 작은 자연물, 생명체도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봄. 자연의 세계가 모여서 우주가 되고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예술가의 운명을 갖고 있다.
백석의 자화상 시와 같음. 나는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있지만 높다. 백석의 강한 자존심을 보여주는 시.
낡은 소재가 쓰였더라도 그 사람의 ‘정서’에는 공감이 가능하다. 감정은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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