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109 [시 모음] 김종삼, 원정(園丁) 園丁(원정) 김종삼 평과 나무 소독이 있어 모기 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며칠만에 한 번만이라도 어진 말솜씨였던 그인데 오늘은 몇 번재나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길을 기어이 가리켜 주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이쪽에는 열리지 않은 과수밭 사이인 수무나무 가시 울타리 길줄기를 벗어나 그이가 말한 대로 얼만가를 더 갔다.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 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하였다. 안쪽 흙 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갈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째를 집어 보아도 놓았던 자리가 썩어 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 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 2024. 4. 16. [시 모음] 문태준, 극빈 극빈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2024. 4. 16. [시 모음] 안도현, 연날리기 연날리기 안도현 우리 거친 엉덩이 하늘에 대고 살아온 한 해 돌아다보니. 그래도 섭섭한대로 괜찮았다 괜찮았다 싶은 것은 아침 해바라기 얼굴로 이 언덕에 모두 모여 사시사철 한숨 날리던 벌판 위로 오늘은. 연을 띄우고 있으므로. 삽과 괭이는 겨울잠을 자게 두고 우리는. 햇볕 잘 스며드는 전주 한지에 추어서 푸른 대나무. 갈라. 다듬어. 붙여 힘센 바람의 성깔 아는 명주실에. 유리풀 먹여 새로 찧은 쌀가마니를 빈 곳간에 져다 부리듯 공중으로. 들창만한 방패연을 냅다 던지면 어느새 얼레 잡은 손목에 불끈 솟는 힘줄이여. 저것 좀 봐. 강 건너 소나무 야산이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것을. 잠자는 줄 알았던. 얼음장 밑 물소리도 두런두런 연줄 따라 감겨 오는 것을. 하늘은 또. 몇 광주리씩 바람을 퍼올리는 것을. .. 2024. 4. 15. [시 모음] 황병승, 주치의 h 주치의 h 황병승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2024. 4. 15.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28 다음 반응형